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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에서 왜 '4할 타자'가 사라졌는가?
타자 기량 탓 아니라 ‘시스템 안정’ 때문
‘백인천 프로젝트’ 결과 나와
[95호] 2012년 05월 01일 (화) 참여와혁신press@laborplus.co.kr

   
박태진 동아사이언스 기자
바야흐로 프로야구의 시즌이다. 해마다 높아지는 선수들의 기량만큼 야구 경기의 재미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겨울 불미스러웠던 경기 조작 사건이 있긴 했지만, 야구팬들은 다시 경기장을 찾아 선수를 응원하고 경기를 즐긴다. 이번 시즌에는 과학자들마저 야구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해 또 하나의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바로 정재승 KAIST 바이오뇌공학과 교수가 지난해 12월 18일부터 시작한 ‘백인천 프로젝트’의 결과다.


선수간 기량 차 적어지는 경향성 발견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MBC청룡팀 감독 겸 선수였던 백인천 선수는 4할1푼2리의 타율을 기록했다. 투수가 던진 10개의 공 중 4개를 쳐내는 확률, 4할의 벽을 넘은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기록인지는 야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4할 타자는 1941년 테드 윌리엄스 이후 나오지 않았고,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4할 타자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백인천 선수 이후 한국 프로야구에서 4할 타자가 나오지 않은 걸까. 이 물음에 대해 과학적인 답을 발표하는 자리가 지난 4월 12일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열렸다. 정재승 교수가 트위터에 제기한 이 질문을 함께 풀고자 건축가, 호텔매니저, 회사원, 검사, 의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58명이 모였다. ‘백인천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번 연구에서 이들은 지난 30년간 한국 프로야구의 데이터를 모두 분석했다. 

기존 야구계에서는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타자의 기량 약화’와 ‘투수의 전문화와 기량 향상’, ‘타자에게 불리한 규칙과 심리적 압박감’ 등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좋은 타자가 나오지 않는데다 투수의 실력이 점차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구원투수제도는 타자에게 분명히 불리한 환경이며 프로야구의 인기와 함께 쏟아지는 관심 등이 타자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속설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우선 야구는 마라톤이나 수영처럼 절대적인 기록을 재는 경기가 아니다. 이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타자 기량을 절대적으로 비교하기 어렵다. 상대방의 실력에 따라 얼마든지 기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투수가 전문화되고 실력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타자의 실력만 제자리걸음이라는 것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심리적 압박감이라면 타자뿐 아니라 모든 선수에게 비슷할 것 같다.

백인천 프로젝트팀은 지난 30년간 프로야구 기록 중 타자의 기량을 나타내는 지표를 계산했다. 그 결과 타자들의 타율은 연평균 0.3리씩 올라갔고, 출루율과 장타율도 매년 0.6리와 1.1리씩 좋아졌다. 하지만 투수의 경우 9이닝당 삼진 수가 해마다 조금씩 올라갔을 뿐 평균자책점과 이닝당 출루 허용률이 높아졌다. 기존 생각과 달리 투수 기량은 매년 조금씩 떨어진 것이다.

이는 기존에 야구계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원인으로 제시했던 ‘투수 기량이 좋아지는 반면 타자의 기량이 떨어져서’라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다. 실제로는 타자 기량이 좋아졌고 투수 기량이 떨어졌는데도 4할 타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연구팀은 또 시간이 갈수록 선수들의 기량 차이가 적어지는 경향을 발견했다. 타자는 물론 투수도 기록이 좋은 선수와 낮은 선수 사이의 기량 차이를 나타내는 표준편차가 줄어들었던 것이다. 결국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최고 타율 선수와 최저 타율 선수 사이의 차이가 줄고, 튀는 선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게 타당한 결론이다.

   
ⓒ 참여와혁신 DB

진화란 진보 아닌 다양성의 증가

이는 과학계에서 인정받는 ‘굴드 가설’이 한국 프로야구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굴드 가설은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이자 야구광인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가 ‘풀하우스(1996년)’라는 저서에서 주장한 이론이다. 그는 “미국 프로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시스템이 안정화돼 최고 타율의 선수와 최저 타율 선수 사이의 차이가 줄어들어 튀는 선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장기적으로 타자의 타율은 2할6푼으로 수렴된다”고 주장했다.

굴드는 하나의 계(시스템)에서 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돌연변이가 나올 확률이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처음 생물이 등장해서는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안정화되면 특이한 변화가 덜 일어난다는 게 그의 이론이다.

한국 프로야구는 30년간 꾸준히 발전해오면서 어느 정도 안정된 시스템을 갖췄다. 이 때문에 4할 타율이 나오는 튀는 타자가 나타날 가능성이 적어진 것이다. 굴드 입장에서 보자면 4할 타자는 일종의 돌연변이인 셈이다. 백인천 선수는 아직 한국 프로야구라는 시스템이 안정되지 않는 상태에서 등장한 특별한 존재였다고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윈의 진화는 ‘서서히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는 것’이다. 자연에서 살아남은 생물은 더 우수하므로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굴드는 여기에 반론을 제기한다. 진화가 반드시 더 좋은 방향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지고 대부분의 선수가 평균 타율에 가까운 기록을 내는 것처럼 말이다.

‘4할 타자의 멸종’을 예로 들며 굴드가 말하고자 했던 건 결국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 1등만 살아남는 게 아니라 다양한 가치를 가지는 모두가 1등이 되는 게 실제 진화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4할 타자가 나오지 않아도 프로야구가 재미있는 것처럼 모두가 1등이 되지 않아도 세상은 아름답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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